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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면을 끓이며

김훈 산문, 문학동네, 2020년 11월 19일 완독

라면은 닭이나 나무 같은 생명체를 직접 거치지 않고 공장에서 대량생산된다는 점에서, 모든 식품 중에서 가장 공업적이다. 라면 포장지에는 60여 종의 첨가물이 적혀 있어서 제조 과정의 공업적 성격을 알 수 있게 해준다. – 28

아버지는 하해와 같은 억겁의 술을 마셨다. 아버지는 식민지의 종로 뒷골목에서 술을 배웠다. 아버지는 망명지 길림에서 마셨고 상해에서 마셨고 천진에서 마셨고 북경에서 마셨고 양자강 남쪽의 포구마을들을 떠돌아다니면서 마셨다. 아버지는 해방된 조국에 돌아와서 그 막막한 잡초밭에서 마셨고 좌우의 피 튀김 속에서 마셨고 전선이 낙동강까지 밀려내려온 피난지 부산에서 마셨고 환도 후에 잿더미가 된 명동의 폐허에서 마셨고 이승만 치하에서 자유당의 무능과 부패를 저주하며 마셨고 박정희 소장이 대통령이 되는 과정을 보면서 마셨다. – 37

모든 밥에는 낚싯바늘이 들어 있다. 밥을 삼킬 때 우리는 낚싯바늘을 함께 삼킨다. 그래서 아가미가 꿰어져서 밥 쪽으로 끌려간다. 저쪽 물가에 낚싯대를 들고 앉아서 나를 건져올리는 자는 대체 누구인가. 그 자가 바로 나다. 이러니 빼도 박도 못하고 오도 가도 못한다. 밥 쪽으로 끌려가야만 또다시 밥을 벌 수가 있다. – 71

빛들은 어둠과 습합되는 방식으로 죽는 것이어서 빛의 죽음은 죽음의 자취를 드러내지 않고, 삶과 죽음의 경계는 지워진다. 만경강 옥구 염전 뚝방에서 저무는 갯벌을 바라볼 때, 삶에서 죽음으로 옮겨가는 일은 바람이 불거나 날이 저무는 일과도 같다. – 96

나는 일이라면 딱 질색이다. 내가 일을 싫어하는 까닭은 분명하고도 정당하다. 일은 나를 나 자신으로부터 소외시키기 때문이다. 부지런을 떨수록 나는 점점 더 나로부터 멀어져서, 낯선 사물이 되어간다. 일은 내 몸을 나로부터 분리시킨다. 일이 몸에서 겉돌아서 일 따로 몸 따로가 될 때, 나는 불안하다. 나는 오랜 세월동안 소외된 노동으로 밥을 먹었다. – 127

망자들이 하필 불운하게도 그 배에 타서 죽음을 당한 것이라고 한다면, 살아 있는 모든 사람들의 삶은 아무런 정당성의 바탕이 없이 우연히 재수좋아서 안 죽고 살아 있는 꼴이다. – 171

책임을 진다는 것은, 지게꾼이 지게를 진다는 말이 아니다. 자리를 내놓고, 감옥에 가고, 할복을 하고 분신을 해서 지옥에 간들 이미 그 해악이 세상에 퍼져버린 사태에 대해서 책임을 질 수는 없다. ‘책임을 진다’는 행위는 사실상 이루어지지 않는다. – 175

이 세상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모든 먹이 속에는 낚시바늘이 들어 있다. 우리는 먹이를 무는 순간에 낚싯바늘을 동시에 물게 된다. 낚싯바늘을 발라내고 먹이만을 삼킬 수는 없다. 세상은 그렇게 어수룩한 곳이 아니다. 낚싯바늘을 물면 어떻게 되는가. 입천장이 꿰여서 끌려가게 된다. 이 끌러감의 비극성을 또한 알고, 그 비극과 더불어 근면해야 하는 것이 사내의 길이다. – 180

이 나라는 살해당한 딸들의 지옥이다. 딸들은 살아서도 죽어간다. 딸들이 딸을 죽이기 위해서 몸을 벌리고, 이 딸들의 지옥 속에서 왕관을 쓴 딸들은 방글거리며 웃고 있고, 그런 세상을 견딜 수 없는 딸들은 악을 쓰면서 발을 구르고 있다. – 255

연장을 쓸 일은 점점 사라져간다. 삶은 규격화되어가고 사물에 대해서 날의 힘을 작동시키는 기쁨도 점점 사라져간다. 슈퍼마켓의 생선이나 고기는 이미 칼질이 끝나 있고, 망가진 가전제품은 전문가가 아니면 손을 댈 수가 없다. 손은 점점 퇴화되어가고 있고, 확인될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세상은 점점 멀어져가고 있다. 삶은 다만 간접적으로 수용되는 정보일뿐이다. – 282

병역은 남자로 태어난 국민의 가장 신성하고 도덕적인 의무라고 말한들 이미 더럽혀지고 허물어진 신성 앞에서 그 말이 무슨 씨가 먹힐 것인가. – 294

언제가 되면, 얼마나 쓰면, 얼마나 읽으면 이런 글을 쓸 수 있단말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