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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과거

은희경 장편소설, 문학과지성사 – 2020년 9월 22일 완독

혼자라는 건 어떤 공간을 혼자 차지하는게 아니라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 익명으로 존재하는 시간을 뜻하는 거였다. – 84

약점이 있는 사람은 세상을 감지하는 더듬이 하나를 더 가진다. 약점은 연약한 부분이라 당연히 상처 입기 쉽다. 상처받는 부위가 예민해지고 거기에서 방어를 위한 촉수가 뻗어 나오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자신의 약점이 어떻게 취급 당하는가를 통해 세상을 읽는 영억이 있다. 약점이 세상을 정찰하기 위한 레이더가 되는 셈이다. – 112

학창 시절 세계문학전집에 빠졌지만 나는 서머싯 몸의 [인간의 굴레]는 읽지 않고 건너뛰었다. 주인공 소년이 절름발이라고 놀림을 받는 설정이 말더듬이였던 작가 자신의 처지를 반영하고 있다는 해설을 어쩌다 먼저 읽고는 전혀 흥미가 생기지 않았던 것이다. 같은 처지끼리 공감을 느끼고 거기에서 위로와 격려를 얻는다는 건 허튼소리다. – 114

모범생들은 눈치를 본다. 문제를 낸 사람과 점수를 매기는 사람의 기준, 즉 자기를 어디에 맞춰야 할지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정답을 맞히려는 것은 문제를 내고 점수를 매기는 권력에 따르는 일인 것이다. 그렇게 그저 권력에 순종했을 뿐이면서 스스로의 의지로 올바른 길을 선택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모범생의 착각이다. 그 착각 속에서 스스로를 점점 더 완강한 틀에 맞춰가는 것이다. – 116

그 담장 안에 안전하게 갇히기 위해 언덕길을 뛰어가고 있는 내 그림자는 과거의 나는 아니었지만 내가 원하는 세계 속의 나라고도 할 수 없었다. – 117

여느 전문가 집단이 다 그렇듯 좌담 참석자는 모두 남자였고 대다수가 경상도 말씨를 썼다. 학보사에 앉아 몇 시간 동안 녹음기를 켰다 껐다 반복하며 들어봤지만 몇 개의 단어는 끝내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중 하나가 ‘배나’였다. 교수가 “이 모든 게 배나의 문제”라고 몇 번이나 강조했기 때문에 반드시 알아야 할 단어였으므로 나는 결국 기숙사에 돌아와 오현수의 도움을 청해야 했다. 배나는 그러니까, 변화였다. 한국 사학의 나아갈 길과 나의 나아갈 길 모두 배나의 문제였다. – 137

아마 2주 정도 푹 빠져 지냈을 것이다. 공원의 팔각정에도 올라가고 극장에서 손도 잡았다. 그 남자가 레코드점에서 흘러나오는 [When I Need You]의 가사 중 “hold out”을 “코닥”이라고 자신 있게 따라 부를 때, 강의실에 있는 자기 책상에 낙서가 많다고 말할 때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어야 했다. 알고 보니 소문으로만 듣던 가짜 대학생이었다. – 231

그의 눈길이 무심코 내 얼굴을 스쳐 갔던 순간보다 급히 되돌아와 다시 머무르던 순간이 훨씬 더 짧더라는 거였다. – 239

상대가 줄 수 없는 것을 원하게 된 파탄 난 관계에서는 남아 있는 사랑의 찌꺼기가 가장 큰 장애물이었다. 가족은 마치 좁은 우리 안의 다친 짐승들처럼 맹렬히 서로에게 상처주기 바빴다. – 282

비관은 가장 손쉬운 선택이다. 나쁘게 돌아가는 세상을 저항 없이 받아들이는 일이기 때문이다. 에너지가 적게 소모되므로 심신이 약한 사람일수록 쉽게 빠져든다. 신체의 운동이 중력을 거스르는 일인 것처럼, 낙관적이고 능동적인 생각에도 힘이 필요하다. 힘내라고 할 때 그 말은 낙관적이 되라는 뜻인 것이다. – 319

“우리가 아는 자신의 삶은 실제 우리가 산 삶과는 다르며 이제까지 우리 스스로에게 들려준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나대로 최근에 읽었던 책의 구절을 머릿속에 떠올리고 있었다. “오래전의 유성우로 지금 존재하는 커다란 호수를 설명할 수 있다.” – 334

나의 약점, 그리고 내 내면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집중할 수 있는 소설이었다. 작가의 자전적인 소설처럼 보인다. 소설안에 또 다른 소설을 가지고와서 주인공과 그 주변 인물들을 설명하며 인간의 본성이 무엇인지 그 내면에 담겨있는 구체화되지 않은 모습을 다시 한 번 살펴볼 수 있게 해주었다.
나라는 존재는 무엇인지, 어디어 온 것인지, 내가 지금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 고요함을 견디지 못해 TV를 습관적으로 켜는 내가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나는 적막함을 견디지 못한다. 적막해지면 공기가 무거워지고 그 무거움이 나를 덮친다.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해 혼자서 생각이 많아진다. 그 생각이 부정적으로 흘러가다가 결국 내가 나를 찌른다.”

억지로 그것을 견디고 버티려하지 말자.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자. 타인은 내 생각보다 나에게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오래간만에 소설을 읽으며 소리내어 웃었던 장면이 두 군데 있었다. 녹취한 음성을 따기 위해 반복해서 듣던 “배나”의 의미를 알게된 장면과 2주 정도 몰입해서 만났던 가짜 대학생의 장면이었다. 책을 읽으며 스스로를 돌아보게되어 몰입할 수는 없었지만 한 동안 두었다가 수년 후 다시 읽어보면 어떤 느낌이 들런지 기대되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