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雨天炎天(우천염천)

지은이 무라카미 하루키, 사진 마쓰무라 에이조, 옮긴이 임홍빈, 문학사상
2020년 9월 7일 완독

한번 사라져 버리면 그런 것들이 존재했다는 사실조차 내 머릿속에서 희미해진다. 내 눈에 비치는 것은 울퉁불퉁한 반도의 해안과 암벽뿐이다. 그리고 해안을 따라 조금씩, 마치 중세로 시간을 건너뛰어 온것처럼 위엄 있는 수도원의 자태가 보이기 시작한다. 아토스다. – 16

걸레처럼 너덜너덜한 라소를 걸치고, 노끈으로 허리춤을 묶고, 헐렁한 주머니 같은 것을 등에 메고 있는 골수파 수도사도 있다. 그것은 수도사라기보다는 솔직히 거지에 가까워 보인다. 그런가 하면 그 옆에는 아침에 세탁소에서 막 찾아온 것 같은 주름 하나 없이 깔끔한 라소를 갖춰 입고, 서류가방을 들고, 선글라스를 쓴, 트렌디한 여피형 수도사도 있다. 그리고 양자를 극단으로 하고 사이에 각양각색의 수도복을 입은 여러 수도사들이 마치 그러데이션처럼 점점이 자리하고 있다. 그들을 한 장소에 모아놓고 순서대로 일렬로 세워보고 싶어질 정도였다. – 24

그리고 침대에 눕자 당연하다는 듯이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너무나 편안한 잠이었다. 비를 맞았을 뿐인데 인간은 이렇게 약해지는구나, 하는 생각이 문득 떠올랐다. 좀 더 심한 비를 사흘 정도 맞는다면 종교에 귀의해버릴지도 모른다. 수도원의 침대는 우리에게 그만큼 고마운 존재였다. – 70

그것은 모든 상황을 머금은 소리이기 때문이다. 상황을 울리게 하는 소리이기 때문이다. 아토스의 밤의 깊은 어둠, 침묵, 우리와는 다른 시간성, 하늘 가득한 별. – 84

나는 계단에서 한동안 그들의 기도에 귀를 기울여봤지만 왠지 방해를 하고 있는 것 같아서 정원으로 나왔다. 비는 그치고 밤하늘은 상쾌하게 개어 있었다. 구름 한 점 없는 밤하늘은, 마치 플라네타리움 처럼 빼곡히 들어찬 하얀 별들로 뒤덮여 있었다. – 87

카라칼르의 매튜도 좋고, 이 프로드롬의 크레만 신부도 좋고, 이들의 대가를 바라지 않는 호의가 없었다면 우리는 훨씬 더 험한 꼴을 당했을 것이다. 우리는 종교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하지만 친절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다. “사랑은 사라져도 친절은 남는다”라고 말한 것이 커트 보네거트였던가? – 121

이처럼 여행을 하다 보면 모든 일이 예정대로 순조롭게 풀리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국땅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닌 장소 – 그것이 바로 타향이다. 그러기에 모든 일은 우리가 마음먹은 대로 전개되지 않는다. 거꾸로 말하면 모든 일이 원하는 대로 풀리지 않는 것이 바로 여행이다. 예상대로 풀리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여러 가지 재미있는 것, 이상한 것, 기막힌 일들과 조우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여행을 하는 것이다. – 129

그런데 며칠이 지나자 이상할 정도로 아토스가 그리워졌다. 사실을 말하면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왠지 모르게 그곳이 그립다. 그곳에서 살고 있던 사람들과 그곳에서 본 풍경과 그곳에서 먹은 것들이 너무나 실감 나게 눈앞에 떠다닌다. 그곳의 사람들은 가난하지만 조용하고, 농밀한 확신을 갖고 살고 있다. 그곳의 음식은 단순하지만 생생할 정도로 실감 있는 맛으로 가득했다. 고양이조차 곰팡이가 핀 빵을 맛있게 먹고 있었다. 
나는 처음에 쓴 것처럼 종교적인 관심이라고는 거의 없는 인간이고 그렇게 쉽사리 사물에 감동을 하지 않는, 굳이 말하자면 회의적인 타입의 인간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아토스의 길에서 만난 야생 원숭이처럼 지저분한 수도사로부터 “마음을 바꿔서 정교로 개종을 한 뒤에 오시게”라는 말을 들었을 때의 일을 묘하게도 너무나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물론 내가 정교로 개종하는 일 따위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수도사의 말에는 이상한 설득력이 있었다. 아마 그것은 종교를 운운하는 것보다는 인간의 삶의 방식에 대한 확신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확신이라는 점에서는 전 세계를 찾아봐도 아토스처럼 농밀한 확신에 가득 찬 땅은 아마 없을 거라는 느낌이 든다. 그들에게 그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확신에 가득 찬 리얼 월드인 것이다. 캅소카리비아의 그 고양이에게 곰팡이가 핀 빵은 세상에서 가장 현실적인 것 가운데 하나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정말 어느 쪽이 현실 세계인가? – 146

창문 밖으로 바닷가에 만들어진 빈약한 유원지가 보였다. 석양의 하늘을 배경으로 관람차가 마치 압류당한 물건처럼 쓸쓸하게 서 있었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로켓 같은 것도 있었다. 사격장, 포장마차 등 싸구려 유원지가 갖추어야 할 것들을 모두 갖추고 있었다. 모두 현란한 색으로 칠해져 있다. (중략) 하지만 지금 흑해의 초가을 저녁 무렵에는 그것은 그저 보는 사람들의 마음을 가라앉게 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오브제처럼 보인다. – 247

구석 쪽에는 유원지를 관리하는 일가가 사는 듯한 텐트가 있었다. 안에서는 텔레비전을 틀어놓았는지 푸른빛이 깜박깜박 흔들리고 있었다. 음식을 만드는 냄새도 났다. 텐트 주위에는 닭들이 목적지도 없이 신경질적으로 돌아다니고 있었다. 하필이면 이런 곳에서 닭으로 태어난다는 게 대체 어떤 기분일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런 생각을 해봤자 어쩔 수 없겠지만. – 247

쿠르드인 문제는 너무나 복잡하고 뿌리 깊은 문제다. 쿠르드는 7세기부터 존재했고 고유의 문화와 언어를 가진 민족이면서 자기들의 나라를 거의 갖지 못했던 비극적인 민족이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민족자결주의 원칙에서도 제외당했고 현재도 터키, 이라크, 이란이라는 3개국에 걸쳐 있는 지역에 살고 있다(시리아와 소련에도 일부 있다). 쿠르드인은 자긍심이 높은 인종으로 아랍인이나 터키인과의 동화를 꺼리며 주변의 모든 나라에서 격렬한 분리독립운동을 일으켜 탄압을 받고 있다. – 281

그러므로 그것은 정말로 현실에 존재했던 것이다. 만약 마음만 먹었다면 우리는 차를 세우고 뒤로 돌아가 그것이 무엇인지 확인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확실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가 그 풍경에 내재되어 있던 무언가에 상처를 주고 손상시키는 것은 아닐까 하는 느낌이 문득 들었기 때문이다. 본능적으로 그런 느낌이 든 것이다. 그리서 우리는 그대로 하카리를 향해 나아갔다. 그리고 그 광경에 대해서 더 이상 깊게 얘기를 나누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이 대체 무엇이었을까? 나는 지금도 그 광경을 확실하고 선명하게 머릿속에 떠올릴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한다. 여자아이는어딘가로가는중이었을것이다. 라고. – 289

나도 계속 상대방의 눈을 바라보다가 한계에 다다라 그곳을 피하기로 했다. 몇 시간 동안 눈싸움을 해봤자 그눈은 이겨낼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사람을 본다기보다 땅에 뚫린 깊은 구멍을 보고 있는 듯한 눈이었다. 아무 감정도 내포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 297

한편 이 소가 어슬렁거리는 중심가를 따라 지즈레 마을은 문자 그대로 두 개의 구역으로 나뉘어 있다. 그 이유는 마을에 커다란 두 가문이 있는데 두 가문은 서로 오랜 세대에 걸쳐 피 튀기는 싸움을 계속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략) 이쪽에 우체국이 있고 저쪽에 약국이 있다. 하지만 이쪽 사람은 저쪽 약국에 들어갈 수 없고 저쪽 사람은 이쪽 우체국에 갈 수 없다. 아무리 생각해도 루이스 캐럴(이상한 나라의 엘리스)의 저자 비슷한 비합리적이고 말도 안 되는 얘기지만, 남의 나라에 있는 남의 마을이다. 논평은 삼가자. – 327

자리에서 일어나 계산을 하고 근처에 있는 맥줏집으로 들어갔다. 여기라면 아이들은 오지 못할 테니. 그러나 아이들은 오지 않았지만 이곳 역시 지독한 곳이었다. 우선 깜깜하다. 아직 오전 열한 시인데 움막처럼 어두웠다. 그것도 어딘지 모르게 외설스러운 어둠이다. 터키의 맥줏집이라는 것은 마치 맥주를 마신다는 행위가 인간에게 중대한 범죄라도 되는 듯이 대부분 어둡고, 외설스럽고, 수상하고, 기분 나쁜 냄새가 난다. 인생의 낙오자가 모여드는 곳 같은 느낌이 든다. – 334

무라카미 하루키가 1988년에 그리스의 아토스 반도와 터키를 여행하고 쓴 기행문이다. 여행기와 기행문의 차이가 무엇인지 공부하고 자료를 찾아보다가 우연히 발견한 소중한 책이었다. 쉽게 읽히고 편안하게 공감이 되었다. 그 편안함에 고생을 한 무라키미 하루키에게 미안함마저 들게 만드는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