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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져 가는 것들의 안부를 묻다

윤신영 지음, 엠아이디 – 2020년 8월 24일 완독

저희가 유해야생동물이 된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야생동물 보호 및 관리에 관한 법률’ 시행규칙에 따르면, 저희는 ‘장기간에 걸쳐 무리를 지어 농작물 또는 과수에 피해를 주고’, ‘전주 등 전력시설에 피해를 주고’있다고 합니다. 네, 피해를 입게 한 점은 사과 드립니다. 애써 지은 농작물이 망가졌거나, 자꾸만 정전이 일어나거나 사고가 난다면 그건 막아야겠지요. 하지만 그게 저희의 ‘잘못’때문일까요. 전깃줄이나 과수원은 사람만이 살아야하는 곳에 지어진 건 아니잖아요. 그 땅은 사람이 살기 전부터 제 어머니의 어머니의 어머니의 다시 어머니의 어머니의 어머니…가 살던 곳입니다. 그런 땅에 전신주가 생겼고 과수원이 일궈졌습니다. 저희는 그저 바뀐 황경에 맞춰 살았던 것 뿐이에요. 살던 땅을 방해하고 침범한 것이 우리 까치인가요?
또 백번 양보해 ‘잘못’을 인정한다고 해도, 그 해결이 저희를 죽이는 방식으로 이뤄지는 게 과연 바람직한 일인가 생각하게 됩니다. 피해를 입는 사람에게는 물론 귀찮은 존재일 수 있지만, 그렇다고 죽여야 할 당위는 없습니다. 무엇보다 우리가 같이 살 방법은 없는 걸까요. 인류는 자신들을 귀찮게 하거나 재산 피해를 발생시킬 여지가 있는 동물과는, 도저히 한 하늘 아래에서 지낼 수 없는 존재인 걸까요. – 123(까치가 남긴 쪽지 中)

따지고 보면 당신 역시 사람에 의한 남획과 혼획의 역사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대양을 누빌 수 있는 태초의 자유를 유지하는 대가로, 당신은 인간이 도전하고 압도해야 할 대상, 거대하고 생명력 넘치는 자연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당신 역시 바다의 정원이 되지 못하고 육지에서 갑작스레 삶을 마감하는 일이 늘었습니다. 우리 사이에는 작은 간극만이 있을 뿐입니다. – 169(돼지가 고래에게)

자유는 온전한 제 생태계 안에 사는 자가 누릴 수 있는 몸의 해방감이고, 속박은 그 자유가 오직 지구의 바다 안에서만 주어진다는 한계를 인지한 자의 겸허한 자기 인정입니다. 그 한계와 속박의 구석구석을, 당신은 다만 누릴 것입니다 – 170(돼지가 고래에게)

어쩌면 인간과 비둘기 둘 사이의 다툼은, 생존력 강한 두 동물이 도시라는 생태계를 동시에 점유하면서 일어나는 어쩔 수 없는 분쟁이 아닐까 싶네요. 그럼에도 둘이 사이좋게 살 수 있는 비법이 있는지 연구해 봐야겠어요. – 191(고래가 비둘기에게)

저들은 ‘원인’이 되는 것을 통해 그 ‘결과’를 예측하는 데에서 더 나아가, 반대로 ‘결과’를 염두에 두고 ‘원인’이 되는 행동을 미리 도모하고 있어. 미래를 예측하고 그 미래를 얻기 위해 현재를 조작할 수 있는 뒤집힌 시간 관념이 있는 거야. 뛰어난 지능 덕분이라고 할까. 그런데 이런 특성은 인류학자들도 주목하고 있는 특성이란다. 인간으로 하여금 구체적으로 예술을 탄생시킨 원동력이라고 보거든. – 199(비둘기가 십자매에게)

말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대답을 들을 수 있는 말과 들을 수 없는 말입니다. 노래에도 듣는이가 있어 귀를 즐겁게 할 수 있는 노래가 있는가 하면, 그저 허공을 울릴 뿐인 노래가 있습니다. 편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받는 이가 있어 답장을 받을 수 있는 편지와, 그렇지 못할 게 분명한 공허한 편지가 있습니다. – 214(십자매가 공룡에게)

동물에게는 사람과 비슷한 종류의 능력이 없다는 편견이요. 하지만 사실 동물은 원래 사람 못지 않은 인지, 계산, 판단, 학습, 기억 능력을 보편적으로 갖고 있는데, 그저 사람들이 인정하지 않아 왔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지닌 숭고한 희생이나 모성애를 애틋하게 생각하는데, 동물 역시 그에 못지않게 애틋한 모성애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 주인공이 오래 전에 살았던 공룡이라고 해서 다르지는 않겠지요. 거대한 몸집에 흉포한 외양을 지닌 파충류라고 해서, 사람에게서 볼 수 있는 많은 능력과 행동이 결핍돼 있을 거라고 믿는 것은 지나친 오만일 것입니다 – 224(십자매가 공룡에게)

재독 철학자 한병철 씨가 ⟪피로사회⟫라는 책에서 지적한 성과 중심 사회가 된 인간 세상의 풍경입니다. ‘우리는 할 수 있다’라는 신화가 팽배해지고, ‘나도 (더) 해야 한다’는 동의가 암묵적으로 사람들 사이에 퍼졌습니다. 그래서 보이지 안헥 경쟁하면서 스스로를 다그칩니다. 인간을 옥죄던 ‘보이지 않는 사자’는, 한때는 타자에 의한 억압이었다가 이제는 자기 자신의 조바심에 의한 자멸적 소진으로 바뀌었습니다. 이런 소진 뒤에 남는 것은 뭘까요. 고작해야 경쟁에서 이긴 자의 피투성이 승리감과, 거기에서 이탈한 낙오자 내지 소외자의 비감뿐이 아닐까요. – 258(비펄로가 세렝게티의 사자와 동료들에게)

일부러 먼 곳에서 큰 동물을 잡기보다는, 가까운 곳에서 볼 수 있는 순한 동물을 사냥했습니다. 그날그날 먹을 만큼만 잡으면 되니까, 아마 그걸로도 충분했을 것입니다. 당신이 창고에 사냥감을 쌓아두고 다른 사람에게 팔아가며 부를 축적하거나, 그 부를 바탕으로 거대한 집단(부족)을 이루고, 이어 다른 네안데르탈인 집단을 위협하거나 굴복시켰다는 등의 이야기를, 저는 결단코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고고학 유물로도 나온 적이 없지요. 그건 현생 인류나 하는 아주 특이하고 고약한 짓이지요. 포악하기로 소문난 우리 사자도 그런 일은 하지 않습니다. – 283(사자가 네안데르탈인에게)

당신의 논리를 자연에 그대로 적용하지는 말아주세요. 이미 당신의 개체수는 자연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습니다. 다른 동물이 이 정도 수준으로 번성했다면, 당신은 틀림없이 ‘이상증식’, ‘창궐’이라는 용어를 써가며 구제에 나섰을 것입니다. – 218(네안데르탈인이 인류에게)

고의를 발명하고 속임수와 계략을 생활화하며, 다른 존재를 자신보다 약한 존재로 ‘만들어가며’ 악행을 행할 구실을 찾는 것은 동물이 아니라 사람(롤랜즈의 용어로는 ‘영장류’)이라고요. 늑대로 상징되는 야생의 동물은 그렇지 않다고요. 강한 동물이 약한 동물을 잡아먹고 사는 냉정한 모습을 보이는 곳이 늑대의 세계지만, 이들은 최소한 능력과 필요 이상의 학살과 착취는 하지 않습니다. 반면 인류는 약한 존재를 가만히 두지 못하고, 이익의 이름으로 빼앗고 괴롭힙니다. 그 결과가 당야성이 줄고 존립이 위태로워진 동물이라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입니다. – 330(에필로그)

재미난 책이다. 내용도 흥미롭지만 구성이 재미있다. 동물이 동물에게, 공룡을 등장시키고 네안데르탈인도 등장한다. 마지막엔 결국 네안데르탈인이 현생의 인류에게 보내는 편지로 마무리하고 있다. 뻔히 알고 있는 이야기를 이렇게 구성해 두니 조금더 현실감있게 느껴진다. 물론 에필로그에서 작가가 이야기했듯이 “동물이 서로에게 인간의 언어와 글로 생각을 주고받는다는 아이디어가 인간 중심주의와 의인화의 오류를 범할 가능성이 있다고 비판할 수도 있습니다만,……” 그로 인해서 인간역시 그 동물들과 얽히고 섥혀있는 생태계, 자연을 구성하고 있는 존재들 중에 하나라는 점을 강조하고있다.

정리할겸 목차를 옮겨 정리해 둔다.

Part 1. 삶의 문턱에서 : 서식지 파괴와 동물
Chapter 1. 인간이 박쥐에게
Chapter 2. 박쥐가 꿀벌에게
Chapter 3. 꿀벌이 호랑이에게
Chapter 4. 까치가 남긴 쪽지

Part 2. 나타남과 사라짐 : 육종과 진화
Chapter 1. 돼지가 고래에게
Chapter 2. 고래가 비둘기에게
Chapter 3. 비둘기가 십자매에게
Chapter 4. 십자매가 공룡에게

Part 3. 경쟁과 협력 : 생의 태(胎)에 대하여
Chapter 1. 버펄로가 세렝게티의 사자와 동료들에게
Chapter 2. 사자가 네안데르탈인에게
Chapter 3. 네안데르탈인이 인류에게

이 책에서 가장 가슴을 울렸던 한 문장.
꿀벌이 시베리아 호랑이에게 보낸 편지의 가장 마지막에 “이 편지는 수취인 불명으로 반송되었습니다.” 였다. 정말로 시베리아 호랑이는 편지를 수신할 수 없을 정도로 사라져버린 것일까?

가볍지만 결코 그렇지 않은 책을 알려주신  ◯◯◯님 께 감사를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