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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세계여행 – 프랑스 파리

2019년 11월 22일 ~ 11월 28일

시칠리아를 제대로 느껴보지도 못하고 쫓겨나는 기분으로 파리로 향했다. 머무는 동안 침대에 누워서 드는 생각, 그리고 떠날때까지도 시칠리아는 아직은 나를 받아주지 않는구나 하는 서운한 생각이 들었다. 파리까지는 약 2시간의 짧은 비행이지만 중이염때문에 비행기에서 기압차로 고생을 하면 어쩌나하는 걱정을 했으나 착륙까지 크게 문제가 없었다. 다만 계속해서 먹먹한 느낌이 있어서 불편은 안고 있었다. 

중이염으로 귀가 먹먹한 상태에서 파리로 이동했다.

프랑스 오를리 공항에 도착을 했다. 한국에서 파리로 여행을 하게되면 대부분이 파리 북쪽에 있는 샤를드골공항으로 입국을 하게되는데, 우리가 이용한 항공사는 시칠리아에서 파리 남쪽에 있는 오를리 공항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여행 중에 전 직장의 후배가 결혼을 했고 신혼여행을 파리로 온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일정을 최대한 맞추려 노력했고, 무엇보다 직접 스테이크를 만들어서 함께 식사를 하고 싶은 욕심에 숙소를 그 기준에 맞춰서 찾다보니 파리시내에서 조금 외곽에 있는 지역에 숙소를 잡게 되었다.

오를리 공항에서 숙소까지는 우버를 이용했는데, 가는 길에 베르사유 궁을 지나면서 파리에 왔다는 실감을 하게되었다. 오를리 공항에서 우버를 이용하면서 처음 우리의 콜을 잡았던 기사의 차를 찾았는데, 그 차는 경찰의 검문에 걸렸는지 경찰이 우리에게 기사는 우리와 함께 있다면서 다른 차를 불러서 가라고 이야기를 해 주었다.  

다른 기사가 무사히 왔고 우리는 벤츠 S500을 타고 숙소에 도착을 했다. 난생처음 벤츠 S500을 타보았는데 역시 명품자동차라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조용하고 쾌적하고 승차감 좋고, 오디오 소리 좋았던, 무조건 좋은것 뿐이었다. 우버로 벤츠 S500을 몰고 다니는 사람이 있다는 것도 신기했지만 내가 그 차를 택시로 이용했다는 것도 더 신기했다.

우버로 벤츠를 이용할 수 있었다.

숙소는 파리에서 17km정도 떨어져 있다보니 좁고 낡고 오래된 건물이 아닌 5층짜리 아파트 건물이었는데 우리나라의 아파트와는 분위기도 다르고 건물과 건물사이의 거리도 상당히 떨어져 있었다. 숙소의 우편함에서 열쇠를 찾았고, 무사히 무인 체크인을 할 수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컨디션은 조금씩 좋아지고 있었고, 다음날 있을 루브르박물관 투어도 무사히 참석할 수 있었다.

파리에 도착해서 동네 약국에 들러서 증상을 이야기했더니 몸살, 감기, 기침에 대한 약을 처방해 주었다. 다행이 가래와 기침, 콧물은 쉽게 멎었지만 중이염때문에 귀는 계속해서 먹먹함이 이어졌다. 인터넷을 검색해서 중이염에 대한 내용을 찾아보았는데, 저절로 나아지는 병이기에 큰 걱정을 말라는 이야기도 있었지만, 심해지면 염증이 뇌에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기에 조기에 발견해서 항생제 처방을 받는게 좋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파리에서 병원방문은 반드시 전화나 인터넷으로 예약을 해야한다.

함께 여행 중인 와이프가 더 큰 걱정할까 걱정되어서 겉으로는 괜찮은척 했지만 조금은 겁이나서 루브르 박물관 투어를 진행해준 가이드에게 파리에서 병원진료를 받을 수 있는지 도움을 청했고, 파리의 병원은 모두 예약을 해야하고 예약을 하지 않으면 얼마나 대기를 해야할지 예측할 수 없다고 했다. 숙소에서 가까운 병원은 3일 후 오후에나 예약이 가능하다는 정보를 들었고, 인터넷 검색을 통해서 파리의 병원에 예약을 할 수 있는 웹 사이트를 찾아서 온라인으로 예약을 했고, 병원을 찾아 진찰을 받았다. 

제일 답답한건 중이염으로 인한 왼쪽 귀의 먹먹함이었는데, 진찰을 해준 나이 많은 의사선생님은 이틀분의 약을 처방해 줄테니 먹으면 좋아질거라며, 정작 먹먹한 왼쪽귀는 멀쩡하니까 걱정말고, 중이염은 오른쪽 귀에 있는데 아주 미미하니까 큰 문제 아니라고 했고, 감기는 언제든지 걸릴 수 있는거니까 체력을 키우라는 처방을 해 주었다. 그 진료비가 60유로. 그리고 처방전을 들고 약국에가서 약을 받았는데 그 약값이 25유로.

파리의 병원 진료비와 처방받은 약값은 어마어마하다.

감기때문에 병원과 약국을 들러서 쓴 돈이 우리돈으로 10만원 정도 된다. 정말 비싸다. 이때는 정말이지 한국이 너무나 그리웠다. 물론 한국에 돌아와서 여행자보험을 통해서 금전적인 보상은 받을 수 있었다.

의사와 약사에게 구글 번역기를 사용해서 대화를 하고 이야기를 들으면서 영어를 잘 해야겠다는 절실함을 또 느끼게 되었다.   

약을 먹으면서 조금씩 컨디션이 좋아지기 시작을 했고 외부에서의 활동시간을 점점 늘리기 시작했다. 

첫 날 숙소에 도착한 시간이 저녁 7시가 되기 전이었는데, 숙소 근처에는 식당을 찾을 수가 없었다. 걸어서 15분 거리에 있는 마트가 문을 닫기 전에 얼른가서 즉석식품이라도 사와서 먹어야 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서둘러 집을 나서는데 같은 층에 사는 프랑스 아저씨와 마주쳤고, 와이프가 갑자기 근처에 식당이 없는지 물었더니 아저씨는 걸어서 40분, 약 2km 정도 가야 식당이 있을거라며 이 동네는 식당이 없다고 이야기를 해 주었다. 와이프는 “아임헝그리”하면서 배를 문질렀는데, 마트를 다녀와서 즉석식품으로 대충 저녁을 먹은 후에 옆집 아저씨가 우리를 찾아와서 수프를 비롯한 야채볶음, 베트남식 튀김만두인 짜조 등을 한 아름 건네주면서 이걸로 저녁을 먹으라며 프랑스말로 배고프면 고생이니까 잘 먹으라며 우리를 챙겨주었다. 마치 큰형님처럼 챙겨주는데 눈물이 날 뻔했던걸 간신히 참았다.

파리에서의 마지막 날에 마트에서 초컬릿 한 상자를 사서 아저씨에게 고맙다면서 우리는 이제 떠난다고 건강히 잘 계시라며 인사를 건넸더니 아저씨는 너무나 아쉽다면서 들어와서 밥을 먹고 가라고 했지만 떠날 시간이 다되어서 그렇게 하지는 못했다. 

프랑스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정말 큰 도움을 받았다.

한 날은, 여행 마지막까지의 일정을 모두 수립해 둔 상태라 전자항공권을 포함해서 몇가지 바우쳐를 프린트 해야할 일이 생겼다. 인터넷으로 검색을 해보니 동네 도서관을 가면 프린트를 할 수 있고, 파리 시내에 있는 피씨방을 찾아가면 프린트를 할 수 있다고해서 동네 도서관을 먼저 찾았다. 그런데 우리가 찾은 시간은 도서관 문을 열기 전이었다. 도서관은 오후 2시에 문을 여는데 우리는 12시 쯤 도서관을 찾았던 거다. 어쩔까 하다가 시내 피씨방을 찾기로 하고 가던 중에 혹시 동네에 있는 작은 사무실이나 부동산에서는 조금의 비용을 들이더라도 인쇄를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동네에 있는 작은 사무실이나 부동산같은 사무실을 찾고 있는데 순간 눈에 들어오는 렌터가 사무실이 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들어가서 물어봤더니 아주 흔쾌히 프린트 해 주겠다며 자료를 달라고 했고, SD카드에 담아간 자료를 건네고 프린트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최소한의 종이값이라도 드리겠다고 하니 절대로  아니라며 파리, 프랑스의 작은 선물이라고 생각해 달라며 그냥 가도된다고 했다. 와이프가 이름이라도 기억하고 싶다고 했더니 자신의 이름은 “루시아”라고 했다. 그 이름은 절대 잊지 못할 것 같다. 

동네 마트에서 엉뚱하게 잘못 구입한 건전지를 반품하고 싶다고 했더니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들을 챙겨준 마트의 직원도 있었고, 지하철 노선을 보면서 방향을 한참동안 못찾고 있었더니 안주머니에서 돋보기까지 꺼내 열차 시간표를 확인하고 방향을 알려준 신사아저씨, 집으로 돌아가는 기차를 타야하는데 어디서 타는지 어떻게 타는지 몰라 망설이는데 먼저 선뜻 나서서 우리를 플랫폼까지 데려다 준 젊은 아가씨, 길거리에서 와플을 하나 사 먹고 싶은데 와플 안에 넣는 크림의 종류를 몰라서 손짓발짓으로 직원과 대화를 하고 있으니 중간에서 도와줄까? 물어보고 통역을 해주면서 크림의 종류를 세세히 설명해주고 소스를 시식까지 할 수 있게 도와준 지나가던 아주머니.

프랑스에서 만난 사람들은 대부분이 친절했고 항상 도움을 주려고 노력했던 사람들로 기억이 된다. 

물론 좋은 사람들만 만난건 아니다. 

몇 달전에 갑작스런 화재로 첨탑과 건물의 일부가 소실 되어버린 노트르담 성당을 보러가는 길이었는데,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우리 둘에게 난데없이 서명을 해달라며 득달같이 달려드는 어린친구 3명이 있었다.

여행전에 얻은 정보에 의하면 로마와 파리를 비롟한 유럽에서는 소매치기나 강매하는 사람들을 조심해야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서명을 해달라면서 들러붙고, 서명을 하고나면 기부하는데 동의했으니 얼마를 내놔라 하는식이거나 악수를 청하는척 하면서 손목에 가느다란 팔찌를 채우고 그 팔찌 가격을 달라는 식, 고약한 냄새가 나는 액체를 옷에 뿌리고 닦아 주는 척하면서 뒤에서 가방을 털어가는 식의 소매치기를 조심하라는 이야기는 이미 들어서 알고 있었다.

당연히 서명판을 들이밀면서 달려드는 세 명의 어린 친구들을 상대도 하기 싫어서 걸음을 재촉했다.

그런데 계속 따라오면서 무어라 떠드는데 정말 성가시게 굴었고, 나는 조금 격앙된 목소리로 “GO!!”, “STOP!!”, “DON’T TOUCH ME!!”라며 소리를 질렀다. 물론 왼손에 핸드폰을 꼭 쥐고 주머니에 손을 넣고 있었고 현금과 체크카드, 여권사본등은 아내가 옷 속에 복대를 이용해서 숨겨두고 있었다. 그 어린 친구들은 정말 성가시게 굴었는데, 어느 순간보니 나와 아내의 거리가 5미터 이상 떨어져 있었다. 나에게 들러붙어 있는 한 녀석과 아내에게 붙어있던 두 녀석이 일부러 우리의 거리를 떨어뜨려 놓은 것이다.

멈추면 들러붙고, 움직이면 아내와 떨어지고하는 아주 애매한 상황에서 그 세 녀석에게 무어라 호통을 치는 두 명의 프랑스 아저씨를 보았고, 그 아저씨들이 뭐라하니 갑자기 그 세 녀석은 우리와 간격을 두었다가 아저씨들이 지나가니 다시 우리에게 들러붙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 녀석들이 사라졌고, 나는 아내와 거리를 다시 좁혔는데, 갑자기 세 녀석 중에 나에게 들러붙어 있던 녀석이 와이프에게 무언가를 건네주고 사라졌다.

노트르담 대성당 근처에서 소매치기를 당했다.

와이프의 손에 들려진건 파리투어에 사용하려고 구입해둔 파리 뮤지엄 패스와 영수증 몇장을 접어서 넣어둔 작은지퍼백이었다. 

그렇다. 이 녀석들은 우리의 사이를 떨어뜨려놓고 서명을 해 달라며 시야를 흐트리고 그 사이에 손을 아래로 넣어서 아내가 메고 있던 작은 앞 가방을 털었던 것이다. 그 세 녀석에게 야단을 쳤던 아저씨가 우리에게 달려와서 아무일 없느냐고 확인을 했는데, 그 아저씨 마저 의심이 가기 시작했다. 파리가 너무나 싫어졌고 무서워졌다. 그리고 나는 아내를 달래느라 진땀을 빼야했다. 그 녀석들이 가방을 열고 손에 잡히는 두툼한 종이뭉치를 들고 갔던것 같고, 가져가서 보니 필요가 없는 것들이고 아마도 지나가던 아저씨 두 명이 주시를 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돌려준 것 같다는 생각이었다.

잃어버린것은 하나도 없었지만 기분도 상했고 그 순간 내 눈에는 아무것도, 어떠한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불에타서 지금은 재건 중인 노트르담 성당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영화 퐁네프의 연인들에 나왔던 다리도 그냥 지나쳤다. 하루 빨리 파리를 떠나고 싶은 마음이 가득 들었고, 파리의 우중충한 날씨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동네 마트에 한국음식 코너가 마련되어 있었다.

동네 마트에는 국제식품 코너가 작게 마련되어 있었다. 다른 도시에서는 한국음식을 구하고 싶으면 아시아 식료품점이나 한인마트를 찾아서 가야했는데, 파리의 숙소 근처 마트에는 국제식품 코너에서 신라면과 김치라면 그리고 비록 일본제품이긴 했지만 즉석 미소된장국을 구입할 수 있었다. 또한 한국 음식코너에는 태극기가 걸려있어서 너무나 반가웠다. 

모나리자가 있어서 더 유명한 루브르박물관은 말 그대로 규모가 엄청났다. 사람도 많았고 우리끼리만 돌아다니기에는 그 규모가 커서 하루로도 모자를 것 같았다. 더 많은 여유가 있다면 서너번 들어가서 둘러보고 싶었지만, 입장료도 제법 비싼편이고 – 예전엔 파리뮤지엄패스를 구입하면 패스의 유효기간 내에는 몇 번이고 상관없었다하는데 최근에 그 규정이 바뀐것인지 유효기간 내에 1번 밖에 입장이 안된다고 했다. 

모나리자는 감상을 할 수가 없다.

루브르박물관에 전시되어있는 그림들을 보면서 지난 여행지인 피렌체에서 시작된 르네상스와 바티칸 박물관의 미술품들과도 계속해서 스토리가가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 참 신기했다. 세상사 무엇이든 단편적인 하나의  부분만으로 전체를 볼 수는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루브르박물관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은 니케, 승리의 여신이었다. 

박물관 투어를 하기 전에 유튜브를 통해서 루브르박물관의 해설을 이미 서너개 시청을 하고 갔는데, 그 실물을 직접보니 더 대단하게 느껴졌다. 뱃머리에 장식되어있었을것으로 추정되는 승리의 여신상을 복원해서 박물관의 높은 계단 위에 전시를 해 두었는데, 아랫층에서 올려다보는 승리의 여신의 모습은 비록 일부분이었지만 그 웅장함과 디테일이 마치 뱃머리에서 실제로 펄럭이는 옷을 입고 튀어오른 바닷물이 옷을 적셔서 그 실루엣이 그대로 드러난 표현 역시 살아 움직이고 있는 느낌이었다. 가만히 보고 있으면 바람이 불어오며 옷자락이 펄럭이는 느낌 착각을 그대로 하게 된다. 

모나리자의 관람은 감상이 아닌 인증샷을 찍는 정도의 시간만 허락되었다. 워낙에 유명한 작품이라 그런것이겠지만 감상은 인터넷으로 하는 거라는 생각을 하면서 나도모르게 피식 웃었다.  

루브르 박물관과 쌍벽을 이루는 파리의 명물인 에펠탑의 야경을 보았는데, 그 웅장함과 화려함이 지금사람이 보아도 압도적으로 느껴지는데, 처음 에펠탑이 세워졌을 당시의 사람들이 이 건축물을 보았을때는 더 엄청나게 느껴졌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에펠탑은 네 가지의 얼굴이 있다고 알려져있다.

에펠탑은 낮에 보이는 시커먼 철골구조물의 에펠탑과 밤에 황금색 조명이 미치는 에펠탑, 또 야간의 매 정시에 약 10분동안의 크리스마스 트리처럼 반짝거리는 귀여운 에펠탑 마지막으로 하루를 마무리하는 밤 1시가 거의 다된 시간에 엄청나게 화려하게 번쩍이는 에펠탑 이렇게 총 4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밤 1시가 되면 집으로 돌아가는 대중교통이 끊어져서 그 모습은 볼 수 없었지만 나머지 3개의 에펠탑의 모습은 모두 볼 수 있었다.   

매 시각 정시에 약 10분 동안 반짝이는 에펠탑

나폴레옹의 개선문도 지나는 길에 가까이서 볼 기회가 있었다. 우라나라 남대문 회전교차로 처럼 주변을 빙 둘렀싸고 도로가 놓어있었고 지하도를 통해서 가 볼 수 있었다. 제일 꼭대기에 올라갈 수 있었는데, 사실 전망이 좋다거니 하지는 않았다. 날씨가 흐리고 비가 흩날려서 그럴지도 모르지만 위에서 내려다보는 샹젤리제거리가 조금 화려하다는 느낌뿐 큰 감흥은 오지 않았다. 아주 커다란 건축물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몇년 전 라오스 여행에서 볼 수 있었던 비엔티안의 빠뚜사이의 생각이 겹치면서 인간의 허황된 꿈, 이런 것들이 바벨탑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폴레옹이 이탈리아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을 보면서 이 보다 더 크고 더 화려한 개선문을 만들라고 명령을 해서 파리의 개선문을 만들었다고 하는데 정작 본인은 이 개선문을 못 보고 죽었다는 이야기도 전해들을 수 있었다.

알려지지 않은 곳에서 발견하는 아름다움이 훨씬 더 크다.

크게 유명한 관광지가 아닌 곳을 내가 찾아냈을 때의 기쁨은 유명한 관광지에서 나도 비슷한 포즈로 사진을 찍고 같은 구도로 사진을 찍는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우연히 들러본 성당에서의 스테인드 글라스가 너무나 화려해서 내 두 눈을 사로잡았다. 생트샤펠 성당인데, 그 내부는 아주 소박하고 조용하지만 그 화려함은 지금까지 봤던 그 어느 성당보다 더 화려하고 멋있었다.  

루브르박물관은 인류의 시작부터 르네상스까지라면 오르세미술관은 그 이후부터 근대까지의 미술품을 전시해두고 있는 박물관이다. 미술시간에 익히 들어서 알고 있는 모네, 고흐, 고갱, 뭉크 등 한 번쯤은 들어봤음직한 화가들의 그림들이 모여있는 곳이다. 이 곳은 한국어 오디오 가이드를 대여할 수 있다고 해서 우리끼리 둘러보기로 했다. 줄을서서 입장을 한 후에 오디오가이드를 대여하러 갔더니 대한항공에서 후원을해서 팜플랫과 오디오가이드가 비치되어 있다는 안내문구가 있었다. 뿌듯하기도 했지만 땅콩사건이 생각나면서 조금 씁쓸하기도 했다.

기억속에 남아있는 그림을 발견했다.

이 곳에서 아주 반가운 그림을 볼 수 있었다. 5살쯤 되었을 때 살았던 집에 걸려있던 그림이다. 어릴적 주방 벽에 비스듬히 걸려있던 그림 두 점이었는데, 어릴적엔 이 그림의 주인공이 우리 엄마인줄 알았던 것 같다.

르노아르의 그림을 만난순간 다리가 얼어 붙었고 그 어릴적의 기억이 흑백필름 속에 튀어나온 컬러필름 같은 느낌으로 되살아나는 신기한 경험을 했다. 

영화 니콜 키드먼과 이완 맥그리거 주연의 물랑루주의 실제 배경이었던 물랑루주를 찾았다. 내 기억이 맞다면 코메디언 이주일 아저씨가 “아! 일단 한 번 와보시라니까요?”라며 광고를 했던 기억이 있는 곳이다. 물론 파리의 이곳과는 관계가 없었을테고 그 당시만해도 명의도용, 저작권 등에 대한 개념이 희박했을 때 였으니 누가 어떤 이름을 쓰더라도 이상하지 않았을 것 같다. 한국의 물랑루주는 종로 어디엔가 차렸던 성인 카바레라고 기억하고 있는데, “초원의 집”이라는 비슷한 업소와 경쟁관계에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일단 한 번 와보시라니깐요?“라는 카피

그런데 이런걸 내가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지도 참 신기하다. 내 기억속 어딘가에 또 다른 재미난 기억이 숨어있는건 아닐까?

물랑은 풍차라는 뜻이고 루즈는 빨간색이라는 뜻이다. 물랑루주는 여전히 영업을 하고 있었고 캉캉춤의 원조가 바로 이 곳이라고 한다. 그 앞에는 덩치큰 가드들이 지키고 있었고 입장을 하려면 당연히 티켓을 구매해야한다. 물랑루주는 몽마르뜨 언덕과 가까운 곳에 있었다.

몽마르뜨 언덕의 제일 꼭대기에는 사르레쾨르 대성당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 성당의 입구에서 바라보는 파리 시내의 전경이 멋졌고, 잔다르크의 동상이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지하성당에 전시해둔 몇몇가지 그림들과 경건한 마음이 들도록 꾸며져있는 지하성당의 모습이 더 기억에 남는다. 부슬부슬 비가 내리는 날씨에 방문해서 그랬던 것인지 지하성당의 위압적인 분위기가 더 포근하게 느껴졌던것 같다. 어디서 나오는지 모르는 잔잔하고 경건한 음악도 좋았다.

성당은 초기 기독교의 순교지로 유명한 곳이기도 하고 처음 자리하게 된 이야기도 두 명의 수도사가 신뢰의 서약을 하면서 시작되었다는 이야기도 팜플렛을 통해서 알 수 있었다.

파리에서 이동할때에는 항상 철도를 이용했다. 지금까지 여행했던 다른 유럽의 도시들과는 조금 다른 방식의 시스템으로 운영되고 있었는데, 서울 지하철의 구간별 요금처럼 파리에는 1부터 5구간까지 요금이 서로 다르게 적용되고 있었다.  

파리 이후의 일정은 유럽여행 중에 일정을 조정하다가 우연히 발견하게 된 안도라공화국을 들러서 바르셀로나로 들어가는 일정이었다. 안도라공화국은 파리와 스페인의 중간에 끼어있는 아주 작은 나라인데 프랑스와 스페인이 1년은 주기로 통치를 하고 있는 나라이다. 또 프랑스에 조공을 아직도 바치고 있는 나라인데 그 내용이 아주 재미있다. 국가의 면적은 광주광역시보다 조금 작고, 인구는 약 2만정도 된다고 한다. 

파리 이후의 일정을 확정하고 조금은 조정을 했다.

최근까지 1년씩 번갈아가며 프랑스에 현금 약 14만원, 카탈루냐의 주교에게는 현금 약 4천원과 햄 6개, 치즈 6개, 닭 12마리의 조공을 바쳤다고 한다. 1993년도에 유엔에 가입한 엄연한 독립국가라고 한다. 

이 안도라공국을 방문하려고 파리에서 열차를 알아봤더니 2번 이상을 환승해야하고 다시 열차시간에 맞춰서 출발하는 버스를타고 약 1시간을 더 들어가야 하는 아주 먼곳이었다. 결국 안도라공국은 포기하고 파리에서 바르셀로나로 바로 이동하는 일정으로 여행을 계속하기로 했다. 물론 이렇게 일정을 변경하면서 더 멋진 보베라는 지역을 잠시 스치듯 지나갈 수 있었는데 그 역시 아주 예쁜 곳이었기에 후회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