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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그 존재로 아버지다.

“아버지, 이제 집으로 가시죠. 엄마와 함께 살던 그 집으로 가시죠.”

7년만에 만난 아버지는 많이 아프셨다.

엄마와 이혼을 하고 나 역시 친가와는 연락이 끊어진채로 그렇게 시간이 흘렀고, 나는 이 엉켜버린 실타래를 언젠가는 풀어야 한다는 막연한 의무감만을 가지고 지내왔다. 아니 어찌보면 현실을 거부하며 내가 사는게 정신없다는 핑계로 시간이 빨리 지나가기만을 기다렸는지도 모르겠다.

작은아버지를 통해서 7년만에 아버지의 소식을 들었다. 갑작스레 연락이 왔고 무언가 큰 일이 생겼음을 직감했고, 작은아버지를 통해 들은 소식은 많이 아프다는 이야기였다. 암에 걸리셨고, 병원에서도 이제는 손을 쓸 수없다고, 앞으로 길면 6개월 정도 남았다는 이야기였다.

기억을 더듬어 보면 사나흘정도 고민을 했던것 같다. ‘내가 어떻게 해야할까?’, ‘어떤 결정과 판단을 해야 최선의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아버지를 그대로 외면하고 모른척 지내면?’, ‘아버지를 찾아뵙고 용서를 청하면?’

고등학생시절 즈음부터 아버지와 엄마와의 관계는 많이 틀어져있었다. 각방을 쓰기 시작하셨고 가끔은 크게 다투기도 하셨다. 부모님의 관계를 내가 속속들이 알 수는 없었고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아버지는 은퇴를 하셨고 적적하게 하루하루를 보내고 계셨다.

내가 27살쯤 되었던 것 같은데, 가끔은 술을 드시고 행패도 부리셨고, 많이 힘들어하셨지만 나는 엄마의 편을 들어야했다. 그리고 사건이 터진건 내 생일 아침시간이었다.

방학이라 집에 와서 밤새 컴퓨터를 만지며 공부를 하던 시간, 새벽 5시쯤되면 엄마는 출근준비를 하셨고, 나는 엄마 옆에서 조간신문의 헤드라인을 읽어드리고 아버지는 주무시는 일상이 반복되는 그 날이었는데, 새벽에 잠이 들즈음 거실에서 두 분이 조금 다투는 소리가 들렸다.

내 생일에 두 분이 다투신다는게 조금은 짜증이 났었던것 같다. 아버지는 술을 드시고 새벽에 귀가를 하셨고, 그 모습이 못마땅했던 엄마가 잔소리를 했나보다. 나는 두 분을 돌려세웠고, 엄마는 출근을, 아버지는 그대로 방에 들어가 주무셨다. 나는 저녁에 되어 친구들을 만나러 나가있었다.

친구들과 소주잔이 두어 순배 돌던 그 즈음, 엄마에게 집으로 들어오라는 간곡한 말투의 전화가 왔고 나는 집으로 들어갔다. 내 눈에 들어온건 상다리 부러지도록 차려놓은 내 생일 상. 2단 케이크가 놓여있고, 생선회 대자가 2접시나 놓여있었다. 아버지는 집에 없고 엄마는 방에서 훌쩍이고 있었고…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그 때의 감정, 기억을 꺼내기는 정말 쉽지 않다.

아버지는 동네에 있는 작은 주점에 계셨고 엄마를 대동하고 그 술집으로 갔다. 그리고 아버지는…..

그 후에 부모님은 이혼을 결정하셨고 갈 곳에 없었던 아버지는 한 동안 집에 계셨다. 법원의 판결에도 아버지께서 가실 곳을 마련할때까지는 함께 있는 것으로 되었고…

얼마 지나지않아 아버지는 따로 나가셨고 그 후로 나 역시 아버지와도, 친가쪽과도 자연스레 연락이 끊어지게 되었다. 엄마를 통해서 아버지가 엄마 명의로 되어있는 집에 가처분 신청을 걸어두었고 그 전에 집을 담보로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 대출을 받아두었던 5천만원 정도의 빚이 있었다.

얼마 후 엄마는 갑자기 돌아가셨다. 그리고 집은 내가 상속을 받았다. 재산을 상속 받으면서 엄마가 가지고 있던 빚도 나에게 고스란히 상속이 되었다.

아버지와 연락이 되지도 않았고, 아버지가 재산행사를 위해서 걸어둔 가처분 신청 때문에, 집을 팔아서 생활비를 마련할 수도, 임대를 줄 수도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고, 오로지 그 집으로 내가 재산행사를 할 수 있는 것은 ‘사망에 의한 상속’ 뿐이었다. 내가 그 집을 상속받았고, 그 당시 약 8천만원정도의 작은 빌라는 내 것이었지만 빚은 5천만원이었다. 채권자들에게 나눠가지고 남은건 동생과 나누는 방법도 있었지만, 그래도 정신적으로 의지할 “집”은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나는 학교를 졸업하기 전에 취직을 해야했고 그 빚을 거의 갚아갈 즈음에 아버지의 소식을 듣게 된 것이다.

“아버지가 많이 아프시다. 암이란다. 길면 6개월 남았다 한다.”

아버지가 아프시다는 것 보다 이제야 내가 살만하고, 숨쉴만하니 나타나서 나를 괴롭힌다는 생각이 훨씬 컸다. 그리고 사나흘 정도 고민을 했다.

‘내가 어떻게 하는게 좋을까?’

큰아버지께서 병원비를 내고 있으니 병원비는 걱정하지 말라해서 금전적으로는 다행이라고 생각했지만 도의적인 책임을 어떻게 해야할지는 결정을 못하고 있었다.

만약 시간이 한참 지나 내가 지금의 아버지 나이가 되었을 때를 생각해 보았다. 그 때가 되서 내가 지금의 결정을 후회하지 않을지를…

동생을 설득해서 아버지를 집으로 모셔오기로 했다. 그리고 아버지를 찾았다. 반지하의 허름한 방 한 칸. 현관도 없어 문 밖에 신을 벗어두고 들어가야하는 방. 세면대도 부엌도 없는 딱 두 명이 누우면 꽉차는 작은 방. 그런 곳에 계셨다.

서너번 찾아갔던것 같다. 집으로 가자고 설득을 했고, 아버지는 “엄마랑 같이 살던 그 집으로 갑시다” 라는 내 말에 마음을 움직였다. 그렇게 짧지만 짧지않은 아버지와의 동거가 시작되었다. 일 주일에 한 번꼴로 아버지는 항암치료를 받고 오셨고 그러고나면 사흘정도는 잠만 잤다. 사흘정도는 건강한 사람처럼 청소도하셨고, 퇴근해서 오는 나를 반겨주기도 하셨다. 아버지는 자신의 몸 속에 엄청난 암세포가 자라고 있다는 사실은 모르고 계시는 것 같았다.

췌장에서 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암이 이미 전신에 퍼져서 췌장은 이미 그 기능을 상실했고 간, 폐, 대장 그리고 척추로 퍼져서 병원에서는 의미없는 항암치료라고 이야기를 했지만, 아버지는 아주 단순한 대장암 정도로만 알고 계셨다.

두어 달 시간이 지났을 무렵 퇴근을 하고 의도적으로 속옷만 입고 아버지가 계신 방에 들어가 같이 이불을 덮고 누워서 아버지와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처음엔 거부감을 느끼던 아버지도 조금씩 마음을 여시더니 엄마와 만나게된 이야기, 나를 처음 안았을때의 느낌, 지금까지 살아왔던 이야기를 해주셨다. 그리고 엄마가 만들어 주던 저녁 밥상의 이야기도, 그리고 엄마가 끓여주던 콩나물국의 이야기도.

나 역시 엄마가 만들어준 콩나물국을 먹고 싶다고 이야길했다.

그 다음날 퇴근을 하고 돌아오니 아버지는 많이 힘드셨는지 주무시고 계셨다. 늦은 저녁을 먹으려고 부엌을 찾았는데, 쓰레기통에 버려져있는 반쯤 삶아진, 한가득 버려져 있는 콩나물.

그랬다. 아버지는 내가 먹고 싶어하던 엄마가 끓여준 콩나물국을 나에게 만들어주고 싶었던 거다. 그리고 그 맛이 나지 않았던 거다. 쓰레기통 한가득 콩나물을 버려두고 여러번 실패를 했던 거다.

나는 그 쓰레기통 옆에 앉아 한참을 울었다. 정말 큰 소리로 울었다. 다행스러운건 아버지는 귀도 잘 들리지 않아 내가 우는 소리는 못들었을거다. 쓰레기통을 끌어안고 한참을 울었다. 이게 아버지가 나를 사랑하는 방식이었던 것이다. 아버지는 사랑을 이렇게 표현하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몇일 후 아버지는 돌아가셨다. 아침 출근 전에 아버지 얼굴에 손을 댔더니 차가웠다. 내가 편히 잠자는 동안 아버지는 너무나 고통스럽게 돌아가신거다. 아주 외롭게. 처절할 정도로 외롭게.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7년전에 엄마가 돌아가셨을때는 정신이 없다는 기억뿐 이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니 하늘에 구멍이 뚫린 느낌이었다. 하늘이 무너진다는게 이런 것일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아버지가 한없이 불쌍하다고 느껴졌다.

나와는 아무런 공감대도 없는 사람이었는데 말이다.

아버지는 그 존재로서 아버지다.

그 다음해에 결혼을 했고, 이제야 아버지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게 된 것 같아 기억에 남아있는 이야기를 기록으로 남긴다.

아버지가 나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그리고 사랑하는지를…